가족을 죽인 사람에게 복수하면 8년 동안 멈춰 있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경주기행>은 복수의 통쾌함보다 그 질문이 훨씬 어려운 영화입니다.
엄마 옥실과 세 딸 장주, 영주, 동주는 막내 경주를 죽인 가해자 백상현을 납치합니다. 목적지는 경주입니다. 가족이 가장 사랑했던 막내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그 아이가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장소입니다.
그래서 네 모녀의 여행은 단순히 범인을 응징하러 가는 길이 아닙니다. 8년 동안 각자 다른 방식으로 붙잡고 있었던 한 사람의 죽음을 가족이 함께 통과하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복수극으로 출발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죽여야 할 사람보다 다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기본 정보
| 감독·각본 | 김미조 |
| 주요 출연 | 이정은, 공효진, 박소담, 이연, 변요한 |
| 국내 개봉 | 2026년 8월 26일 |
| 러닝타임 | 111분 |
| 관람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 장르 | 가족, 범죄, 스릴러, 로드무비, 블랙코미디 |
| 제작 | 스튜디오하이파이브 |
| 공동제작 | 유포리아이엔티 |
| 배급 | 롯데엔터테인먼트 |
경주라는 이름이 사람과 장소를 동시에 가리키는 이유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제목입니다.
'경주'는 도시의 이름이면서 네 모녀가 잃어버린 막내딸의 이름입니다.
막내 경주는 수학여행을 떠난 뒤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가족에게 경주라는 장소는 관광지가 아니라 가장 행복했던 가족의 시간이 끊어진 곳이 됩니다.
8년 뒤 네 모녀가 다시 경주로 향한다는 설정은 그래서 특별합니다.
그들은 단순히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8년 동안 피하지도 떠나지도 못했던 '경주'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 경주를 잃은 가족이 장소 경주로 돌아가면서 영화의 복수와 애도가 동시에 시작됩니다.
엄마 옥실에게 복수는 정말 백상현을 죽이는 일일까
이정은이 연기하는 옥실은 막내딸을 잃은 엄마입니다.
딸을 잃은 뒤 남편마저 세상을 떠났고, 옥실에게는 세 딸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는 8년 동안 가해자를 잊지 않습니다. 백상현이 다시 세상으로 나오자 직접 복수를 실행하기로 합니다.
겉으로 보면 목표는 분명합니다.
가해자를 죽이면 됩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 목표가 달성되느냐보다 옥실이 왜 그렇게까지 복수를 붙잡고 살아왔는지를 바라봅니다.
복수가 끝나는 순간 옥실은 다른 문제와 마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경주가 없는 삶을 정말로 살아가야 합니다.
어쩌면 옥실에게 복수는 경주를 잊지 않기 위한 방법이면서, 경주와 완전히 이별하는 순간을 8년 동안 미뤄온 방법이기도 합니다.
네 모녀는 같은 사람을 잃었지만 같은 슬픔을 겪지 않았다
<경주기행>이 가족극으로 흥미로운 이유는 네 사람이 하나의 복수심으로 움직이는 집단처럼만 그려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겪은 가족이라고 해서 슬픔의 모양까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옥실은 딸을 잃었고 장주, 영주, 동주는 동생을 잃었습니다. 서로 같은 사람을 사랑했지만 그 사람과 맺었던 관계도 다르고, 사건 이후 8년을 버텨온 방식도 다릅니다.
그 차이는 여행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드러납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굳이 설명하지 않았던 감정, 상대가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마음, 엄마를 위해 참아온 딸들의 시간이 복수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밖으로 나옵니다.
결국 이 가족이 함께 해결해야 할 것은 백상현만이 아니라 8년 동안 서로에게 말하지 못했던 감정이기도 합니다.
장주는 왜 엄마와 자신을 거의 하나처럼 만들었을까
공효진이 연기하는 첫째 장주는 엄마에게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딸입니다.
장주는 엄마를 이해하고 보호하려 합니다. 엄마가 다치지는 않을지 살피고, 엄마의 선택을 자신의 선택처럼 받아들이려 합니다.
이 모습은 흔히 말하는 '장녀의 책임감'으로도 읽히지만, 영화에서는 조금 더 복잡합니다.
장주가 엄마에게 가까이 붙을수록 자신의 감정은 뒤로 밀려납니다.
동생을 잃은 사람은 엄마만이 아닙니다. 장주 역시 자신의 동생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엄마의 슬픔이 너무 커 보이기 때문에 자신의 슬픔을 충분히 꺼내지 못한 채 엄마를 돌보는 사람이 됩니다.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은 때로 자신의 상처를 말할 기회까지 빼앗습니다.
장주의 감정이 중요한 이유는 복수 여행을 통해 그가 처음으로 엄마의 딸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슬픔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영주는 법을 알지만 가족의 복수를 멈추지 못한다
박소담이 연기하는 둘째 영주는 법을 공부한 인물입니다.
이 설정은 사적 복수를 다루는 영화에서 특히 의미가 있습니다.
가족 가운데 법과 제도의 언어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정작 법 밖에서 벌어지는 복수에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영주는 무엇이 합법이고 무엇이 범죄인지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가족이 8년 동안 겪어온 고통 앞에서는 법의 판단과 가족이 원하는 정의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주의 존재는 영화가 사적 제재를 단순하게 정당화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법을 안다고 슬픔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가해자가 처벌받았다고 유가족의 시간이 자동으로 다시 움직이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주는 가장 강해 보이지만 막내의 자리를 잃은 사람이다
이연이 연기하는 동주는 프로레슬러 출신입니다.
몸을 사용하는 데 익숙하고 세 자매 가운데 가장 거칠고 강해 보이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동주에게는 다른 두 언니와 조금 다른 상처가 있습니다.
원래 이 가족의 막내는 경주였습니다.
경주가 사라진 뒤 동주는 살아 있는 세 딸 가운데 가장 어린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가족 안에서 새로운 막내가 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족의 시간에는 여전히 경주가 막내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의 자리가 너무 크게 남아 있을 때 살아 있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서야 하는지조차 잃을 수 있습니다.
강한 신체와 여린 내면이 함께 있는 동주는 바로 그 모순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왜 가해자 백상현에게 긴 사연을 만들어주지 않았을까
변요한이 연기하는 백상현은 네 모녀가 8년 동안 기다려온 복수의 대상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그에게 관객의 동정을 끌어낼 만한 긴 사연을 부여하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김미조 감독은 이 이야기의 핵심이 백상현이 아니라 경주를 잃고 남겨진 가족에게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가해자의 어린 시절이나 범행 이유를 자세하게 보여주기 시작하면 이야기의 중심도 자연스럽게 그에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경주기행>은 그 방향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왜 그가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를 이해시키기보다 그가 남긴 폭력 이후 가족에게 어떤 시간이 계속됐는지를 바라봅니다.
가해자의 범행은 한순간에 끝났을지 몰라도 피해자의 가족에게 사건은 8년 동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복수하러 가는데 왜 자꾸 웃게 될까
<경주기행>은 설정만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어둡고 무거워야 할 것 같은 영화입니다.
딸을 잃은 가족이 살인범을 납치해 복수하러 떠납니다.
그런데 영화에는 의외로 많은 생활의 웃음이 들어옵니다.
네 모녀는 복수하러 가면서도 밥을 먹어야 하고, 화장실에 가야 하고, 이동하면서 티격태격합니다.
김미조 감독은 이 일상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람에게 아무리 비극적인 일이 생겨도 모든 시간이 비극적인 표정으로만 흘러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에서도 배가 고프고, 울다가도 사소한 일에 웃을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웃음은 슬픔을 잊었다는 증거가 아니라 슬픔을 가진 채로도 사람은 계속 살아간다는 증거입니다.
노란 봉고차가 복수극을 가족여행으로 바꾼다
네 모녀는 노란 봉고차를 타고 경주로 향합니다.
차 안이라는 공간은 이 영화에서 중요합니다.
복수라는 목적만 생각하면 가장 빠르게 가해자를 처리하면 됩니다. 하지만 로드무비가 되는 순간 목적지보다 그곳까지 가는 시간이 중요해집니다.
차 안에서 네 사람은 계속 붙어 있어야 합니다.
피할 수도 없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오래 묻어두었던 감정이 튀어나옵니다.
김미조 감독이 이 작품에 영향을 준 영화로 <미스 리틀 선샤인>과 <괴물>을 언급한 것도 흥미롭습니다.
한쪽에는 덜컹거리는 차를 타고 함께 움직이는 이상한 가족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위기 앞에서 더욱 기묘하게 뭉치는 가족이 있습니다.
<경주기행>은 그 두 감각을 복수극 안으로 가져옵니다.
가해자를 죽이러 떠났는데 정작 여행이 진행될수록 서로를 다시 바라보게 되는 가족.
그래서 노란 봉고차는 복수의 이동수단이면서 동시에 8년 동안 흩어졌던 가족을 다시 한 공간에 밀어 넣는 장치입니다.
김미조 감독의 실제 네 자매 경험이 영화에 들어간 방식
김미조 감독 역시 실제 네 자매 가운데 막내입니다.
<경주기행>의 범죄 사건이 감독 가족에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영화의 범죄와 복수는 픽션입니다.
대신 가족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에는 감독이 오랫동안 자신의 가족을 바라보며 느꼈던 감정이 녹아 있습니다.
특히 세 딸의 성격에는 실제 언니들에게서 가져온 특징이 일부 반영됐습니다.
엄마를 이해하고 만족시키려 애쓰는 첫째의 모습, 영리한 둘째의 성격, 실제 프로레슬링을 했던 셋째 언니의 특징 등이 캐릭터를 만드는 재료가 됐습니다.
하지만 실제 가족을 그대로 복제한 것은 아닙니다.
감독은 자신의 경험과 너무 밀착하지 않기 위해 각 인물을 독립적인 캐릭터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현실적인 부분은 범죄 사건 자체가 아니라 같은 엄마를 두고도 자매마다 전혀 다른 엄마를 기억하고, 같은 가족 안에서도 각자의 상처가 다르다는 감각입니다.
<갈매기>에서 <경주기행>으로 이어지는 것은 폭력 이후의 시간이다
김미조 감독은 장편 데뷔작 <갈매기>로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받았습니다.
<갈매기>가 한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과 그 이후의 시간을 바라봤다면, 첫 상업영화 <경주기행>은 한 사람의 죽음이 남은 가족 전체에 어떤 시간을 남기는지 바라봅니다.
두 작품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건 자체보다 사건이 지나간 뒤입니다.
뉴스 속 사건은 범인이 잡히고 재판이 끝나면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그날 이후의 삶은 계속됩니다.
사건에는 끝이 있어도 상처에는 같은 방식의 종결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경주기행>의 8년이라는 시간도 바로 그 간극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가 사적 복수를 통쾌하게만 만들지 않는 이유
가해자를 직접 응징하는 이야기는 관객에게 강한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습니다.
법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피해자가 직접 해결한다는 설정에는 분명 장르적인 쾌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경주기행>은 복수를 만능 해결책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백상현을 응징한다고 경주가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이 잃어버린 8년이 되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엄마와 세 딸 사이에 쌓인 감정까지 자동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복수는 끝이라기보다 가족이 멈춰 있던 시간을 움직이게 만드는 계기에 가깝습니다.
복수의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이 끝난 다음에도 이 사람들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복수의 목적지가 경주라는 것은 결국 애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처음 출발할 때 네 모녀가 바라보는 것은 백상현입니다.
그가 자신들의 가족을 무너뜨렸고, 그를 없애야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여행이 계속될수록 시선은 조금씩 가족 내부로 이동합니다.
엄마는 딸들을 보고, 딸들은 엄마를 보고, 자매들은 서로가 8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확인합니다.
이 변화가 중요합니다.
가해자를 바라보는 동안에는 가족 모두가 같은 방향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해자가 사라진 뒤에는 결국 서로를 바라봐야 합니다.
복수는 백상현을 향하지만 애도는 살아남은 네 사람이 서로를 향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경주를 잊는 것이 아니라 경주 없이 살아가는 법
<경주기행>이 이야기하는 회복은 잊어버리는 것과 다릅니다.
사랑했던 가족을 잃은 사람이 어느 순간 그 사람을 완전히 잊고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것은 오히려 현실과 거리가 멉니다.
옥실과 세 딸에게도 사건 이전의 가족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습니다.
경주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있던 시간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가족에게 가능한 것은 과거를 복구하는 일이 아니라 경주가 없는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것이 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억하면서도 살아가는 것, 사랑하면서도 보내주는 것, 그리고 떠난 사람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들까지 멈춰 있지 않는 것.
영화가 복수 이후까지 바라보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경주기행은 죽이러 떠났다가 살아 돌아오는 가족의 이야기다
<경주기행>의 출발점만 보면 네 모녀의 목표는 명확합니다.
8년 동안 기다린 가해자를 붙잡고 경주로 데려가 자신들의 방식으로 복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정말 오래 바라보는 것은 죽여야 할 사람보다 남겨진 사람들입니다.
옥실에게는 딸을 잃은 엄마의 슬픔이 있고, 장주에게는 엄마를 지키느라 밀어둔 자신의 감정이 있습니다. 영주는 법과 가족 사이에서 흔들리고, 동주는 죽은 막내가 남긴 자리 옆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야 합니다.
네 사람 모두 경주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 때문에 서로를 충분히 바라보지 못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가해자에게 가까워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서로의 슬픔을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김미조 감독은 복수극의 형식을 빌렸지만 사적 제재를 정답으로 내놓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응징한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상처받은 가족이 한순간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영화가 묻는 것은 그다음입니다.
복수가 끝나고 더 이상 미워할 사람만 바라보며 살 수 없게 됐을 때, 이 가족은 서로를 바라보며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제목의 '기행'은 단순한 경주행 여행만을 뜻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 8년 동안 멈춰 있던 가족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긴 여정입니다.
<경주기행>은 죽이기 위해 출발하는 복수극이지만, 결국 도착하고 싶은 곳은 남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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