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은 사람이라면 뫼르소가 해변에서 죽인 남자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원작에서 그는 끝내 이름을 얻지 못한다. 그저 '아랍인'으로 불릴 뿐이다. 프랑수아 오종 감독은 이 오래된 침묵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뫼르소의 무감각과 부조리를 충실하게 따라가면서도, 1938년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누가 말할 수 있었고 누가 이야기 밖으로 밀려났는지를 함께 바라본다.
그래서 오종의 <이방인>은 카뮈의 유명한 소설을 흑백 영상으로 옮긴 작품에 머물지 않는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는 남자가 왜 살인보다 자신의 감정을 심판받는지 묻는 동시에, 그 재판에서조차 정작 죽은 사람의 삶은 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지를 되묻는다. 원작의 부조리를 보존하면서 그 주변에 존재했던 식민지 알제리의 현실까지 화면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이번 영화의 중요한 차이다.

영화 이방인 기본 정보
| 작품명 | 이방인 (L'Étranger / The Stranger) |
| 감독 / 각본 | 프랑수아 오종 (François Ozon) |
| 원작 | 알베르 카뮈 소설 <이방인> (1942) |
| 주요 출연 | 뱅자맹 부아쟁, 레베카 마르데르, 피에르 로탱, 스완 아를로, 드니 라방 |
| 촬영 | 마뉘 다코스 |
| 음악 | 파티마 알 카디리 |
| 장르 | 드라마 |
| 상영시간 | 120분 |
| 프랑스 개봉 | 2025년 10월 29일 |
| 국내 개봉 | 2026년 9월 30일 |
| 주요 이력 |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남자, 뫼르소
1938년 알제. 뱅자맹 부아쟁이 연기하는 뫼르소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받고 장례식에 참석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슬픔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리고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 동료였던 마리를 만나 관계를 시작한 뒤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뫼르소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가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는지 묻는 질문에도 상대가 원하는 답을 만들어내지 않고, 사회적으로 적절해 보이는 감정을 연기하지도 않는다. 오종은 이런 인물을 과장된 냉혈한으로 만들기보다 세상의 감정 규칙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사람처럼 바라본다.
그 대신 영화가 강조하는 것은 뫼르소의 감정보다 감각이다. 햇빛과 더위, 바람과 바다, 피부에 닿는 감촉처럼 몸으로 느끼는 세계가 중요하다. 오종 역시 뫼르소가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대신 감각에는 민감한 인물이라는 점을 영화의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았다.
태양 때문이었다는 말은 살인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뫼르소의 일상은 이웃 레몽 생테스와 가까워지면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피에르 로탱이 연기하는 레몽은 자신의 연인과 얽힌 문제에 뫼르소를 끌어들이고, 그 갈등은 결국 해변까지 이어진다.
뜨거운 태양 아래 혼자 걷던 뫼르소는 해변에서 한 알제리 남자와 마주하고 총을 쏜다. 한 발이 발사된 뒤 그는 쓰러진 남자에게 다시 네 발을 쏜다. 카뮈의 소설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쉽게 설명되지 않는 사건이다.
이 장면에서 태양은 단순한 날씨가 아니다. 눈을 찌르는 빛과 피부를 압박하는 더위, 땀과 피로 같은 육체적인 감각이 뫼르소의 행동과 뒤섞인다. 그렇다고 태양이 살인의 책임을 대신 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합리적인 동기를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뫼르소의 설명이 얼마나 받아들이기 어려운지를 드러낸다.
영화는 여기서 관객에게 불편한 위치를 남긴다. 살인은 분명히 뫼르소가 저질렀지만 그 행동을 하나의 깔끔한 심리적 동기로 설명하려 할수록 사건은 오히려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법정에서는 왜 살인보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중요해졌을까
재판이 시작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법정이 다루어야 할 사건은 한 사람의 죽음이지만 검찰은 뫼르소가 어떤 아들이었는지를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었는지, 커피를 마셨는지, 장례식 다음 날 무엇을 했는지가 그의 인격을 판단하는 증거처럼 사용된다.
여기서 <이방인>의 중요한 질문이 드러난다. 사회는 범죄 행위만 심판하는가, 아니면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슬퍼하고 사랑하고 후회하지 않는 사람까지 심판하는가.
뫼르소가 불편한 존재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지만, 동시에 사람들에게 용서받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감정을 만들어내지도 않는다. 법정은 그가 저지른 살인과 그의 성격, 어머니에 대한 태도를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 그가 어떤 인간인지를 규정한다.
오종은 이 재판을 통해 카뮈의 부조리라는 철학적 질문을 유지하면서도 또 다른 빈자리를 보여준다. 모두가 뫼르소가 어떤 아들이었는지 이야기하는 동안 정작 살해당한 남자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오종은 왜 이름 없던 아랍인을 다시 바라보았을까
프랑수아 오종의 영화가 원작과 가장 흥미롭게 갈라지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카뮈의 소설에서 뫼르소가 죽인 남자는 이름을 얻지 못한다. 그는 작품 속에서 '아랍인'이라는 정체성으로 남는다.
오종은 원작을 다시 읽으면서 아랍인들이 이야기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1930년대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프랑스계 주민과 알제리인들이 같은 공간을 살아가면서도 얼마나 다른 위치에 있었는지를 영화에서 더 분명하게 보여주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원작에서 크게 확장되지 않았던 피해자 쪽의 시선을 추가한다. 하자르 부자위트가 연기하는 제밀라는 살해당한 남자의 누이로 등장하고, 오종은 그녀를 통해 죽은 사람이 누군가의 가족이었으며 자신의 삶을 가진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화면 안으로 가져온다.
이 변화는 뫼르소의 이야기를 없애거나 카뮈의 소설을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원작에서 말해지지 않았던 부분을 80여 년 뒤의 시점에서 다시 바라보는 선택에 가깝다. 뫼르소가 사회에서 이방인이라면, 식민지 알제리에서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또 어떤 의미의 이방인이었는지를 묻게 만든다.
흑백인데도 태양과 바다가 강하게 느껴지는 이유
오종은 1938년 알제리를 흑백으로 촬영했다. 촬영감독 마뉘 다코스의 화면은 색을 제거하면서 오히려 빛의 존재를 강하게 만든다. 하얗게 쏟아지는 햇빛과 어두운 실내, 사람의 피부와 바다의 반사가 명암으로 충돌한다.
흥미로운 것은 카뮈의 소설 자체는 색채와 감각에 대한 묘사가 풍부하다는 점이다. 오종 역시 흑백을 선택하는 것이 역설적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색 대신 빛과 질감, 육체적인 감각을 통해 소설의 세계에 접근했다.
이 선택은 뫼르소라는 인물과도 연결된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긴 감정의 언어로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햇빛과 더위, 바람과 물에는 반응한다. 영화가 그의 마음을 직접 설명하는 대신 피부에 닿는 세계를 보여주는 이유다.
뱅자맹 부아쟁은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연기하지 않는 사람을 만든다
뫼르소 역은 뱅자맹 부아쟁이 맡았다. 그는 앞서 오종의 <썸머 85>에도 출연했으며, 이번에는 표정과 말투를 크게 드러내기보다 절제된 방식으로 뫼르소를 표현한다.
오종은 뫼르소를 만들면서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에서 배우를 다루는 방식을 참고했다고 설명했다. 감정을 대사와 표정으로 친절하게 전달하기보다 관객이 인물에게 감정을 투영할 수 있도록 중립적인 상태에 가깝게 두려 했다는 것이다.
레베카 마르데르가 연기하는 마리는 그런 뫼르소와 다른 생기를 가진 인물이다. 피에르 로탱의 레몽은 뫼르소를 사건 속으로 끌어들이고, 드니 라방의 살라마노와 스완 아를로가 연기하는 사제 등 주변 인물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뫼르소와 관계를 맺는다.
이 인물들이 중요한 이유는 뫼르소가 혼자 철학적인 독백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랑과 우정, 폭력과 종교처럼 사회가 의미를 부여하는 관계 속에 그를 놓았을 때 그의 무관심과 침묵이 더욱 선명해진다.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2025년에 다시 만든 이유
<이방인>은 1942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영화는 이야기를 현대의 프랑스로 옮기지 않는다. 배경은 여전히 1938년 알제리이고 뫼르소의 삶과 살인, 재판이라는 기본적인 구조 역시 원작을 따른다.
대신 오종은 시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위치를 조금 이동시킨다. 카뮈가 이야기의 중심에 두었던 뫼르소를 그대로 따라가면서도 그 주변에 존재했던 식민지 사회를 더 보이게 만든다. 프랑스인과 알제리인이 같은 도시를 살아가지만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현실이 화면 곳곳에 들어온다.
음악을 쿠웨이트 출신 작곡가 파티마 알 카디리에게 맡긴 것도 이런 방향과 연결된다. 오종은 영화에서 아랍인의 존재가 원작처럼 사라져 있기를 원하지 않았고, 피해자의 가족과 식민지 알제리의 시선을 이야기 안에 남기려 했다.
그래서 이 작품의 현재성은 SNS나 현대 사회의 특정 현상을 카뮈의 철학에 직접 대입하는 데서 찾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1942년의 소설을 거의 같은 시대적 배경으로 다시 보여주면서, 당시에는 이야기의 주변부에 있었던 사람을 오늘의 영화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현재적이다.
누가 진짜 이방인이었는가
<이방인>을 뫼르소만의 이야기로 보면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감정을 표현하지 못해 공동체에서 밀려난 사람이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사랑 앞에서도, 종교 앞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규칙과 어긋난 이방인이다.
하지만 오종의 영화는 그 질문을 한 번 더 뒤집는다.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뫼르소는 사회적 규범에서는 이방인이지만 식민지 질서 안에서는 프랑스인이다. 반대로 그가 죽인 알제리 남자는 자신의 땅에서 살아가면서도 원작의 서사에서는 이름조차 갖지 못한다.
개인적으로 이번 <이방인>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이 두 종류의 소외가 한 영화 안에서 마주한다는 점이다. 오종은 뫼르소의 부조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카메라를 조금 옆으로 돌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사람을 바라본다.
그 결과 제목의 의미도 넓어진다. 사회가 원하는 감정을 연기하지 않는 뫼르소만이 이방인인지, 식민지의 역사 속에서 목소리와 이름을 잃었던 사람이야말로 또 다른 이방인이었는지 묻게 된다. 카뮈의 문장을 그대로 반복하는 대신 그 문장 주변의 침묵까지 바라본다는 점에서, 프랑수아 오종의 <이방인>이 고전을 다시 영화로 만드는 이유가 드러난다.